퇴계는 이(理)가 아직 <내 속에서> 가려져 있고, 숨막혀 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지금 그 이(理)를 구현하고 있다기보다 방해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율곡은 내가 이(理)의 온전한 실현을 방해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지만 또한 그 이(理)를 실현하고 있는 측면에도 유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퇴계는 도덕적 비관을 주축으로 하고 있고, 율곡의 학파는 도덕적 낙관에 기울고 있다. 퇴계의 문하에서는 금욕주의와 경건주의의 기풍이 자랐고, 율곡의 학파는 그 낙관을 불안해하며 인성(人性)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지평을 열었다.
이것이 <회복의 모델>의 개요이다.
다산은 이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우주적 질서와 인간의 규범을 <연속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우주는 닫힌 질서이고, 인간은 열린 규범 위에 있다. 자연 세계는 물리적 법칙에 따른 <필연>의 세계이지만, 인간세계는 인문적 작위에 따른 <우연>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있어 우주적 보편의 성리(性理)란 없거나 무의미하다.
다시 말하면 다산에게 있어 <돌아가야 할 본원>, <회복해야 할 본성>은 없다. 본성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 내부의 근원을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 밖의 역사 세계를 향해 표출될 뿐이다. 인간의 길은 자신의 도덕적 본체를 자각을 통해 <발견>하고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가능성을 행위를 통해 <실현>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도정이다. 그는 자연이 아니라 작위에 자신의 입각점을 세웠다. 마루야마가 일본 고학(古學)에서 발견한 자연과 작위의 모델(김석근 역, <일본정치사상사연구>,통나무)은 다산에게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는 일본의 경우, 무사들의 실용성을 추구한 나라답게 주자학의 문사적 종교성이 정착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는 주자학으로부터의 전환은 조선의 경우 더 심대하고 실질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다산은 <자연>과 <자유>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에너지를 선험과 우주적 보편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것을 경험과 사회적 실천으로 옮겨 놓은 것은 다산 사상의 선구적 성취이다.이 바탕 위에 그의 실학적 작업이 포진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를 근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근대를 어떻게 읽느냐는 논란이 있다. 나는 소박하게 그 지평을 개인의 욕망을 승인하고, 그 권리를 인정하며, 사회적 복지를 승격시키려는 합리성으로 감각한다. 산업과 과학, 그리고 자본주의가 그 이념을 따라 발전되었다. 근대는 도덕이나 규범을 절대적 선험적 지평에 두지 않는다. 규범과 질서는 개인의 이익이 충돌하고, 사회적 혼란이 예상되는 <현장>을 조정하는 상대적 지평에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다산의 위치는 애매하고 과도적이다. 그는 길을 단선이 아니라 복선으로 잡았다.그 곡절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나 한다. 그는 우주적 보편에서 인간의 위상을 독립시킴으로써 새로운 인간학을 정초시켰다. 그의 인간학은 분열적 현실 위에 자리잡았다. 그 분열은 일찍이 퇴계가 강조한 바였다.
그러나 그는 퇴계처럼 기(氣)를 제어하고, 이(理)를 발양하는 것을 <자기 내적>으로 회귀시키지 않았다. 그는 이 작업이 <자기 외적>으로 즉, 일상의 사회 관계와 개인의 사회적 역할에서 구축된다는 생각에 철저했다. 여기서 그는 이(理)의 발양에는 유교적 신학을 천명하고, 기(氣)의 제어에는 법가적 장치를 원용했다. 인간 속에는 두 가지 상반되는 의지, 즉 영명(靈明)과 형구(形軀)의 기호(嗜好)가 호발(互發)하기에 각각 그에 합당한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길은 두 갈래이다. 유가이면서 법가, 혹은 표면적 경학으로는 유학이지만, 실질적 경세학에서는 법가인 이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편에서는 초월적 신학을 주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법가적 실용성을 과감하게 도입한 그의 사유의 지형을 어떻게 정돈해서 읽어야 할까.
나는 다산이 조선 유학의 거시적 흐름인 <주자학>에서 <실학>으로, 혹은 이학(理學)에서 기학(氣學)으로의 도정에서의 <과도적> 단계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한다. 다산은 주자학에 애매하게 동거하고 있던 자연학과 신학을 선명하게 분화시켜 이원화했다. 과학적 사고와 사회정치적 개혁에서는 기(氣)에 입각한 자연학을, 그리고 인간의 실존 도덕학에서는 이(理)에 입각한 신학을 각각 병렬적으로 정초시켰다.
그것은 주자학의 혁신이지만, 불완전한 동거일 수도 있다. 인문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선험적 신학의 밧줄을 벗고 경험적 과학으로 이동한 것은 북학(北學)파의 선도를 거쳐 혜강 최한기에 의해 본격적으로 실험되어 <하나의> 체계를 구축한다. 이런 점에서 다산은 실학으로의 <전환>을 이끌고 <토대>를 마련했지만, <완성>은 후대의 과제로 넘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