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주리(主理)의 주자학
다산과 주자학과의 관계 또한 일방적 비판과 단절로만 볼 수 없다. 학계는 대체로 다산을 탈주자학자, 반주자학자로 부른다. 그의 경학은 의심할 바 없이 <새로운 유학>인 주자학의 발상과 체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오래된 유학>인 원시 공맹의 사유에로의 회귀로 일관하고 있다. 나 자신 일찍이 <주희에서 정약용으로>라는 제목 하에 그를 주자학과의 순전한 <단절>로 읽었지만 그것은 사태의 일면 혹은 표면임에는 틀림없으나 전모, 혹은 심층이라 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있었다.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갈라서 생각해 보려 한다.
다산의 주자학 비판의 핵심은 <주자학의 포괄적 연속적 구상>을 향해 있다. 다산은 주자학이 자연과 인간, 정신과 육체, 자연과 자유를 우주의 보편적 패턴 하에 뭉뚱그린 미분화적 사유라고 비판했다. 다산은 이 모두를 분리해서 바라본다. 그런 다음 인간의 도덕적 존엄을 차별 없이 모두에게 가능성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의 향외적(向外的) 도덕론이 이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 그의 논점 다섯을 나누어 살펴보자면,
1) 인간과 자연 세계는 서로 다른 원리를 갖고 있다. 자연 세계는 물리적 생물학적 법칙에 지배되고 있지만, 인간은 자유와 도덕의 영역을 갖고 있다.
2) 인간은 생물학적 지배를 갖는 육신과, 초월적 가치를 실현하는 정신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이 둘은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싸우는 격전장이다. 쉽게 화해를 낙관할 수 없다.
3) 육신과 정신의 기원은 서로 다르다. 육신은 대지적 요소의 산물이고, 정신은 초월적 절대자로부터 온다. 육신을 극복하고 정신을 실현하라는 지상의 명령은 인간의 도덕감을 통해 언제나 울리고 있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이 내면의 목소리를 떠날 수 없다.
4) 이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 있다. 인간의 존엄은 주자학이 주장하듯 선천적 기(氣)의 편향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은 심신의 기능이 아니라 도덕적 의지에 있고, 그것은 성과 신분, 그리고 문화적 차이와는 상관없이 두루 평등하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 개인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5) 주자학은 인간이 그 전쟁터에서 승리함으로써 확보하는 것이 본래적 자연의 <정화> 혹은 <회복>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덕성은 일상과 사회적 공간에서 도덕감을 실현해 나감으로써, 점진적으로 <획득>되고 <형성>되는 것이다.
이 정도만 보더라도 주자학과 다산 사이의 거리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또한 그 차이를 너무 과장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본다. 나는 이 다섯 가운데 상당 부분이 이미 주자학적 전통 속에 선취(先取)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공유는 주기적(主氣的) 전통이 아니라 주리적(主理的) 전통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산은 주기적 전통과는 깊이 절연했으되 주리적 전통의 유산에는 크게 빚지고 있다. 이를테면1)과 2), 3)은 이미 퇴계의 사유 속에 내재하고 있고, 4)는 후기의 주리적(主理的) 발전에서 보이고 있다.이들을 하나 하나 짚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