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코민테른의 국공합작권고에 숨겨진 비밀
초창기 중국공산당에게는 한계가 존재했다. 중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아직은 미개척지가 많았고 국민이 깨어나는 중이였을 뿐 전체적으로 미개했다. 이 뜻은 코민테른 입장에서는 중국공산당을 키우기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간다는 의미다.
소련은 1922년 11월부터 12월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 그럴듯한 목표안을 중국에 제시했다. 이때 참석한 이가 바로 천두슈였고 코민테른은 국공합작 방식을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사회주의와 소비에트공화국이라는 목표는 비현실적이므로 노동자계급은 우선 부르주아계급과 협력해야 하며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중국국민당의 그늘에 들어가 자체 역량을 확대해야 한다”면서 중국국민당과 합작을 권고했다. 코민테른은 두 당이 독자적 입장을 유지한 채 협력하는 ‘당외黨外 합작’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 협력하는 ‘당내 합작’을 권고했다. 천두슈는 이 권고를 거부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1923년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됐다.
천두슈가 어쩔 수 없는 권고에 코민테른의 입장을 받아들인데 반하여, 리다자오는 국공합작에 호의 적이었다. 리다자오 생각은 중국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려면 범국민적 기반 위에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사상적 발판은 천두슈가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국제주의적 성격인데 반하여, 리다자오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지지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리다자오가 공산당으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했다는 것은 사고의 유연성도 있었겠지만 늘 홀로 떨어져서 활동하던 군벌과 같은 존재라는데 해답이 있다. 즉 공산당원으로 국민당에 가입한다는 것은 국민당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 준 것이다.
리다자오의 이러한 뜻을 알아챈 쑨원은 1924년 1월 중국국민당의 최고의결기관인 중앙상무위원회를 5인으로 구성하면서 거기에 라다자오를 포함시킨 것이다.
1924-1925년의 정치상황
1922년 코민테른에서는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합당하라 권했지만 1924년에는 군벌 펑위샹溤玉祥이 베이징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이 일대의 실질적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쑨원을 베이징으로 초청해서 새 정부를 조직하게 했다.
국민당에도 가입해서 양 쪽에 적을 두고 쑨원으로부터도 최고의결기관 상무위원 5인에 포함된 리다자오는 그렇다면 과연 어떤 입장이 되었을까? 불행히도 그에게는 불운한 환경이었다. 펑위샹은 공산주의자를 엄벌하는 칼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코민테른의 국공합작 같은 것에는 추호의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펑위상은 1924년 11월에는 베이징의 쯔진청紫禁城(자금성)에서 생활하고 있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추방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베이양군벌 돤치루이를 조종해서 공산주의자들을 혹독하게 탄압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5년 쑨원이 죽자 중국국민당은 반공적인 우파의 지배아래 놓이고 국공합작의 무효를 선언하는 동시에 리다자오를 제명하기에 이른다.
리다자오의 교수형과 천두슈의 축출
국공합작이 깨진 1926년의 분위기는 펑위샹 주도로 중국국민당 우파가 주도했기에 좌파까지도 척결의 대상이었다. 중국국민당의 좌파와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반외세 민족주의 반정부 시위에 무력진압을 시도해 40명 이상이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이른바 3•18대 학살 사건이고 루쉰은 이날을 ‘민국 이래로 가장 암흑한 날’이라고 기록했다.
리다자오 역시 이 시위에 참여해서 머리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고, 체포령이 떨어지자 가족과 함께 베이징에 상주하는 소련공사관으로 피신했다.
1927년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은 이미 베이징까지 그 세력을 확장해 있었다. 그가 세력을 확장할 때는 이미 서양세력과 일본 외교단과 사전에 교섭을 끝내고 소련공사관을 습격했다. 그곳에서 약 1백여 명의 러시아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을 체포했는데, 리다자오와 그의 부인 두 딸도 함께 체포됐다.
그들은 곧 형식적인 재판에 회부됐다. 리다자오는 위신과 평온은 지키면서 자신의 신념을 의연하게 밝힘과 동시에 아내와 두 딸의 석방을 요구했다. 다행히 아내와 두 딸은 4월 28일 저녁에 석방됐다. 다음 날 그들은 베이징의 한 신문에서 리다자오가 다른 19명의 중국국민당좌파 인사들 및 중국 공산당 인사들과 함께 자신들이 석방된 바로 그날에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9세에 지나지 않았다.
▲ '공산주의 순교자'와 '혁명 열사'로 추앙된 리다자오 초상이 새긴 우표. 마오쩌둥(좌)과 리다자오(우)
리다자오의 처형은 공산주의자들 뿐 아리라 국민들에게 커다란 적개심과 항의를 불러 일으켰고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그의 시신을 가족들에게까지 내주려 하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베이징 선무문 밖의 한 불교사원에 임시로 마련된 장지에 매장됐다. 그로부터 약 4년 후 베이징대학의 장몽린張夢麟 교장이 미망인을 대신해 베이징정부에 항의함으로써 리다자오의 시신은 합당한 장례식을 거쳐서 새롭게 매장될 수 있었다.
한편 천두슈는 리다자오가 처형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제1차 국공합작이 붕괴되는 시점에 코민테른은 그 책임을 천두슈에게 씌워, 당 총서기직과 중앙위원직에서 몰아냈고, 1929년에는 완전히 당에서 몰아냈다.
천두슈는 몇 번 재기를 노렸지만 실패했고, 1932년 10월 15일에 상하이에서 체포돼, 다음 해 난징국민당정부의 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당정부의 유화정책 차원에서 사면령을 내렸는데 그때 그도 가석방 됐다. 천두슈는 결국 잠시 충칭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건강이 나빠져 충칭 서쪽의 작은 마을인 장진에서 은거했다가 1942년 5월 27일 63세의 일기로 죽는다. 그는 공산당에 의해 쫓겨났기에 최소한의 예우조차 받지 못한 채 고향 땅인 안후이성 안칭시의 교외에 그저 평범하게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