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하게 <대순전경>의 짝퉁인 <선도진경>과 <선도진경>의 짝퉁인 <전경>에는 기존의 어느 경전에도 없는 말로 둔갑되어 있습니다. 즉, <현무경(玄武經)>의 원본이 셋이며 한 벌은 증산 상제님이 도창현에서 불사르시고 하나는 차 경석이 가졌으며 나머지 하나는 상제님이 품속에 지녔다고 왜곡하여 아예 안 내성 성도 집에서 집행된 사실이 삭제된 채 날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왜곡은 당연히 비공식적으로 상제님 혈육을 통해 상제님 품속의 현무경을 조 철제가 전해 받았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이는 안 내성(安乃成) 성도에게 집행된 천지공사의 원 뜻을 모르는 동지한식 105제의 과도기에 고육지책으로 주장해 온 사실왜곡에 불과합니다.
증산 상제님께서 안 내성(安乃成) 성도에게 내리신 절대 신권의 종통 사명기(司命旗)와 <현무경(玄武經)> 공사에 대해 태모님 수석 성도이신 고 민환 성도는 <선정원경(仙政圓經)>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연이수기(然而隨其) 건곤양위(乾坤兩位) 사업원리(事業元理) 종지(宗旨)하야 귀의본원이수기성경신(歸依本源而隨其誠敬信)하야 내성의세성업(乃成醫世聖業)하야 만방(万邦) 유일포덕(惟一布德)인저” 즉, 건곤 상제님 양위 천하사 종지에 따라 본원(本源)에 귀의하여 그 성경신을 따라 내성(乃成)이 의세성업(醫世聖業)하여 만방에 유일포덕하라는 것입니다.
<보천교普天敎 교전敎典>*기유년己酉年설날 월곡의집에서 현무경玄武經을 쓰사 흰병甁에 물을 담은 후에 양지洋紙에 글을써서 권축卷軸을지어 병甁입을 막어놓고 그앞에 백지白紙를 깔고 백지위에 현무경玄武經을 놓아두시니라
<대개벽경(大開闢經)>*기유년(1909) 춘정월 원단에 상제님께서 대흥리 경석의 집에서, 현무경(玄武經)과 병세문(附記 참고)을 지으시니라.
-己酉春正元 大先生 在大興 作 玄武經 病勢文-
<나의 세상 龍華仙境이 오면>*기유년己酉年 정월正月 일일一日에 상제上帝 대흥리大興里에 계시면서 현무경玄武經과 병세문病勢文 두 권을 작성하사 양지洋紙위에 놓으시고 백병白甁과 소도小刀를 그 옆에 놓으시고 종이를 오려서 길화吉花에 개길실開吉實하고 흉화凶花에 개흉실開凶實이라 쓰시고, 글을 쓴 종이를 말아서 병마개로 하시니라.
<용화전경>*세존님께서 정읍 차 경석 집에 계실 새 기유 년 정월 1일에 백지를 가져오라 하사, 책 2권을 말어 병속에 넣으시고 종이로 마개를 막아 그대로 두게 하신지라. 화천하신 후 그 마개를 떼어보니 길화길실(吉花吉實) 흉화흉실(凶花凶實)라 써 있고, 그 책 2권을 내여보니 한 권은 현무경(玄武經) 부(符)요, 한 권은 현무경(玄武經) 서(書)리라.
<용화전경>*이 현무경은 차 윤칠이가 보관 중 당시 관(官)의 통제가 심하므로, 부득이하게 잿더미 속에 숨겨두었다가 얼마 후에 내여 보니 그 자(字)는 여전하나 책지(冊紙)가 가히 상한지라. 고로 본문 위에다 초지(初紙)를 대고 필사한지라, 원문 초에는 초서하시고 지기금지원위대강은 정서(正書)하신지라.
<선도진경(宣道眞經)>*己酉年 正月一日 巳時에 玄武經 세벌을 종필하시어 한 벌은 친히 품속에 지니시고, 또 한 벌은 道昌峴에서 불사르시고 나머지 한 벌은 京石의 집에 맡기시니라.(<전경典經>도 동일)
<증산교사(甑山敎史)>*(김형렬의 교단분립)자타가 수제자로 인정하는 김 형렬은 수부(首婦)로 들여세웠던 딸을 개가(改嫁)케 한 과실로 인하여 자기에게 내려야 할 사명이 고부인(高夫人)에게 옮기게 되어 결국 신해년(道紀 41, 1911)에 약방기물을 고부인(高夫人)에게 인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에 지난 일을 후회하여도 믿을 말이 없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증산교사(甑山敎史)>*계축년(道紀 43,1913) 봄에 고부인(高夫人)을 가 뵈이고 현무경을 등본하여와서 그 오묘한 법을 잠심 추구하더니 이해 가을에 장 기동(張基東), 장 기준(張基準)이 찾아오므로 두 사람을 데리고 본소에 와서 고부인(高夫人)께 뵙고 인하여 일로부터 교단에 협력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증산교사(甑山敎史)>*갑인년(道紀 44, 1914) 정월에 장 기동(張基東)이 본소로부터 와서 경석과 다투고는 내력을 말하니 형렬이 크게 분노하여 교단을 이탈하고 이로부터 경석을 크게 미워하며 기동(基東)과 교단에서 이탈한 종도들로 더불어 따로 교단을 세우기를 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