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이 되는 뿌리와 바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저 ㅌㅂ교에서 순진순수하게 신앙하는 분들도 백만대군의 의지로 하는것이고
밀알들의 혁명 또한 백만대군의 의지로 진행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 대군이 진군하는 앞길에 고운 비단길이 깔리고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면 이 또한
우리들의 의지를 녹슬게 만들고 스스로 나태하게 만드는 경계의 대상이므로
풍진이 일고 진창과 수렁이 가득하여 우리들의 한계를 무한확장해 볼수 있는 환경이 오히려 우리들에게는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구름한점없고 마냥 화창한 날 소풍가듯 걸어가기만 해도 될 길이라면 이 길에 뛰어들지도 않았을겁니다.
더불어 그 대군이 나아가는 앞길에 간간히 여흥을 마련해주느라 고군분투하시는 짬여러분께도 심심하게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최근에는 “옥단소”라는 재탕+완전모방사이트를 만들어 (혁명사이트플랫폼이 마음에 무지 들었는가봅니다, 쨕퉁샤오미가 울고 갈 정도로 어찌 그리 잘 베꼈는지) 새로운 창조짬의 경지를 넓혀가는 고군분투에 찬사를 보냅니다.
이야기가 잠시 흘렀는데 여러분이 아무리 고군분투해봐야 짬은 결코 성장할수 없습니다.
늘 거기서 그 수준을 유지하며 온갖 현란한 자체발광에 그치고 말겁니다.
화살같이 지나가는 이 바쁜 시절에 젖먹던 힘까지 짜내 자체발광의 명도를 높이시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짬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것의 바탕에 비이성적인 분노와 증오가 깔려있다는것입니다.
역시 두 부류, 앞장서서 그릇 유도하는 주동자들과 그냥 분노에 동참해서 따라가는 동조자들, 여러분의 단체가 성장하지 못해도 주동자들은 손해볼게 없습니다.
그들은 짬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지 이 시대를 교묘하게 파고 들어 순진한 사람들을 선동하고 광분하게 만드는 고도의 처세술을 이미 본능적으로 익힌 사람들이기에 여기서 실패해도 어디 가서 또 몇몇 끌어모아 판을 차리면 될일이기에 크게 손해볼건 없을겁니다.
하지만 도둑질도 뱃심이 있어야한다고 동조하시는 분들도 몇몇의 핵심주동자들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고귀한 인생을 직업적선동가로 유턴할 뱃심이 있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함께 발을 담그지 말아야할것입니다.
천지는 無情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인간만이 유독 정情에 집착합니다.
짐승도 본능적인 정情이 있지만 딱 거기서 거기까지 본능적인 수준까지만 필요이상으로 정情에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세월의 마라톤이라는 승부에서 짐승에게도 뒤지는 인간이 허다합니다.
자신의 업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말없는 자연이 가르쳐주는 이치에 순응하는 동물들에게 인간은 오히려 배워야할점이 많을수도 있습니다.
동물들은 인간들처럼 집착하고 무리하게 자충수,꼼수를 부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인간의 모든 감정활동이 정情에 기초한다고 봅니다.
물론 사람으로 태어나 살다보면 사랑과 증오,미움, 분노,기쁨,슬픔과 같은 정情의 활동에 집착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윤회를 거쳐 궁극적으로 우리가 닮아가야할길은 천지의 無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情에 집착하다보면 그 情에 기초한 모든것들이 찰나와도 같은 인생을, 어쩌면 무한한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거기서 또 다시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숭고한 여행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비극이 시작되는것입니다.
인간은 정(精)을 뭉쳐야 살고 精이 흐트러지면 죽습니다.
그래서 과도하게 精을 소모하거나 역시 과도하게 정情(사랑,분노,증오,미움,절제되지 않은 즐거움의 감정)에 집착해도 역시 그 정精을 소모해버리는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뿌리를 거스르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바탕을 말살하고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종국에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됩니다.
미시적으로는 전혀 신중하지 못한 분노와 증오로 자신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그 멀어버린 눈과 귀로 자신의 아집이라는 풀장을 만들어놓고 여기는 동해바다라고 우기는 웃지못할 참극이 일어나는것입니다.
그 광분의 情에 집착하여 헛되이 精을 소모해버리라는 광분의 유혹에 동조해서 기껏 동네풀장에서 바다의 자유를 느끼려는 어리석은 천지의 탕아들로 전락하고 마는것입니다.
모두가 미시적인 정情에 얽매이고 또한 미시적인 정情에 격분하는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이 얼마나 허망한것인지를 스스로 알게 될것이며
그때 가서 후회한들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수는 없습니다.
대국적으로 기틀을 보고 대국적으로 바라보면 여러분들처럼 쉽게 분노하고 쉽게 망동할일이 없습니다.
내가 뿌리를 인정하고 바탕을 간직하면 열풍뇌우가 몰아치는 비바람속일지라도 나에게는 허물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그 비바람속을 뚫고 나아가는데 내가 몇일을 굶고 아무리 허약해도 나는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바탕을 잘 간직하는 것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심주(心柱)를 잡는것입니다.
제가 천학비재하여 그것이 도심주(道心柱)인것까지는 모르겠으나 근본과 바탕을 간직하고 보존하는것은 그것만으로도
심주(心柱)라는 기둥을 잡는것이며, 그 심주를 잡는 것은 단 일기일회一期一會(단 한번의 기회)뿐입니다.
어떠한 경우,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단 한번의 일기(一期)의 기회만 있을뿐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감정의 통제나, 임기응변, 즉각 변통해야 할 상황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하늘이 나에게 여러번의 기회를 준다면 우리는 그 하늘을 신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나를 기만하게 되는것이므로 내가 허물이 없는고로 하늘은 나에게 단 한번의 기회만을 부여해주라고
강력히 소청해도 우리들에게는 또 다시 허물이 없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현재에만 집착하지않으며,
비록 몸은 이곳에 있지만 눈과 귀와 마음은 항상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거울로 삼고
인내와 인고의 마음으로 미래를 신중히 기다릴뿐 결코 자신의 감정의 노예가 되어 경거망동하지않습니다.
천지는 말이 없고 오직 無情하기만 합니다.
그 무정한 천지가 가르쳐주고자 하는, 하나가 있다면 그 하나는 뿌리를 찾고 온전히 바탕을 간직하는것입니다. 그것이 천하의 근본이 되는 것은 인간문명이 싹튼 이래, 선천이나 후천이나 동일한것입니다.
뿌리를 거론하는자 도끼로 찍어내버리겠다는 어느분의 발칙하나마 깜찍한 발악에 이 범부는 잠시, 아주 잠시 실소를 머금을뿐이며, 그러한 나의 의지에 대해 스스로 허물없음을 알기에 일일이 그런 발악에 내 감정의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도 없거니와 오히려 따분함과 무료함과 심심함이 더할뿐입니다.
어디에서 뭘 하며 밥을 먹고 살던, 인격은 스스로 만드는것이지, 여러분의 세치혓바닥과 허울좋은 자칭 참신앙의 참진리자체가 인격을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무분별하고 비이성적인 망동은 진리를 무시하고 진리자체를 거북하게 만드는 아주 얄팍하고 아주 선동적인 오지랖에 지나지 않는다는 고언을 드리는바입니다.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