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의 결과로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 난징조약
1800년대의 중국은 안팎으로 엄청난 시련에 봉착해 있었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선봉이 되어서 저지른 아편전쟁(1840-1842)은 중국 하류층 백성들의 삶을 굶주림과 기아로 몰아넣었고 왕정의 착취는 갈수록 심해졌다. 영국은 그들의 식민지 인도산 아편을 재배해서 거대 중국의 백성들을 마취 시켰다. 이 아편무역에는 미국도 동참해서 중국에 막대한 악영향을 주었다.
▲ 아편에 중독된 청조 말의 백성들
어떤 중국인은 아편을 사기 위해 자식과 마누라까지도 팔아야만 했다. 더욱더 가관인 것은 관료들과 병사들까지도 아편을 얻기 위해 아편 상인들의 하수인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당시 아편대금으로 외국에 지출한 대금은 청 왕조 총수입액의 57%에 육박해 경제자체의 뿌리까지 흔들릴 정도로 심각했다. 이에 당황한 황제는 즉시 아편무역을 금지시키고 임칙서에게 특명을 내려 영국 상인들의 아편 237만근을 압수해 모조리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그러자 영국은 중국 내에 있는 자신들의 재산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막강한 화력으로 청국을 공격했다. 이에 청국도 맞대응을 했으나 그 결과는 무참하게 대참패로 결정 나고 말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편전쟁이었으며 그 결과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던 청국은 영국의 최신식 무기에 굴복하고 마침내 후세에 두고두고 치욕적인 난징조약에 서명하고 말았다.
난징조약은 1843년 6월 홍콩에서 비준서가 교환된 것으로 13개 조문으로 이루어 졌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는 것이다. 이후 영국에 할양되었던 홍콩이 재차 중국으로 반환된 시점은 1997년 7월 1일이다.
아편전쟁의 영향으로 태평천국 혁명을 일으킨 홍수전
▲ 청말 홍수전과 제 1차 아편전쟁을 주도한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군인들
아편전쟁으로 패배한 청국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더 비참해 졌고, 인육을 먹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은 극을 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했던 농민출신 홍수전이 1851년 1월 태평천국의 깃발을 내걸고 금전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기독교 개념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그들은 그 개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홍수전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임을 자처했고 만주족(청조인)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마의 화신이라고 여겼다. 그들이 봉기 초창기에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은 청조, 청군의 부패와 무능에 그 이유가 있었지만 그 이유보다는 그들의 엄격한 군기, 관료 및 지주들을 공격해 그 전리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세금을 면제해 준다는 구호에 농민들이 크게 호응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평천국의 교리는 엄격히 우상을 부정했는데 특히 유교와 공자를 강하게 비판한 유일한 신앙 등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종교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원시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최초로 실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태평천국의 교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모해져 갔다.
홍수전은 계평의 첫 전투에서 스스로 천왕이라 칭하고 군사들에게는 머리를 기르고 붉은 수건을 두르게 했다. 1853년 3월 홍수전은 남경을 탈환한 후 천경이라는 이름으로 개명 한 후 수도로 정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북경을 공략하기 위해서 박차를 가했다. 이에 위급함을 느낀 황제는 정예병으로 태평군을 방어하고 도망갈 궁리를 하는데 서태후가 적극적으로 말렸다. 한편 서태후는 1852년 22세에 태자를 낳으면서 귀비가 되었고, 서서히 권력의 날개를 달면서 국정 전면에 나서게 된다.
서태후는 중국의 마지막 황후로 1835년 강남 에호나라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한 신비로운 예언은 청 왕조를 창시한 누루하치(1559-1626)에 의해서다.
그는 여진족의 추장으로 1583년에 군사를 일으켜 전全만주족을 통일하고 국호를 후금으로 정한 후 19년에 명나라군 10만을 격멸하고 21년에는 요동을 공략했으며, 그 후 26년에 몽고 파림부를 공략 중 병사했다. 청왕조는 17세기 중국을 정복한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에호나라는 그가 멸망시킨 부족이다. 서태후가 1835년 에오나라에서 태어났을 때, 청나라의 창시자 누루하치가 에호나라의 여자가 청조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에로우호 사건으로 촉발된 제 2차 아편전쟁
에로우호 사건은 아편전쟁을 빌미로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영국과 불란서, 미국이 자신들의 권익을 확대하기 위해서 아홉 차례에 걸쳐서 청나라에 조약을 수정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가 이를 거절하자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던 중 1856년 10월 밀수선 에로우호에서 수병이 잡히자 영국이 석방을 요구했는데 청이 이를 거절하게 된다.
이에 격분한 영국이 광주를 공격했으나 청군에게 대패하게 된다. 이 사건은 영국 본토에 전해졌고, 영국은 이를 구실로 불란서와 연합해서 제 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황제의 죽음 그리고 서태후의 전면 등장
▲ 젊은 시절 서태후(좌)
영국과 불란서의 막강한 화력에 황제는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주려 했으나 서태후는 굴욕스러운 강화보다는 떳떳하게 싸우는 전쟁을 주장했다. 서태후는 그들과 팔리교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대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 결과 황제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북경을 버리고 도망쳤고, 서태후는 북경에 홀로 남아서 황제의 측근 8명과 충돌하면서 끝까지 북경사수를 외쳤다. 그러나 영 •불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북경은 잿빛 색깔인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도시로 변했다.
이 때 심한 병에 걸린 황제는 정국 운영을 8인에게 부탁하고 정국 결정권을 동태후와 서태후에게 일임한 후 죽고 말았다. 서태후는 온순한 동태후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8인의 대신들에게 전쟁 책임을 물어 모조리 처형해 버린다. 곧이어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여비의 사지四肢를 잘라서 산채로 물독에 넣어 죽여 버린다.
이제 거대한 중국은 서태후가 깔고 앉아 전 대륙을 손가락 하나로 놀아나게끔 만들었다. 서태후는 곧 6세인 아들을 황제에 즉위케 하고, 영국과 불란서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태평군을 물리쳐 달라는 서태후의 요구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구조건에 의하여 영국 미국 용병들이 개입하여 청군을 최신식 무기로 탈바꿈 시킨 후, 태평군 진압에 나서게 된다. 1864년 천보성을 함락시키고 천경을 포위하자, 홍수전은 더 못 버티고 1864년 6월 1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로써 태평천국의 난은 봉기 13년 만에 영국과 미국 즉, 외세의 도움에 협공 당하여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청조 말 이 혼란기에 대륙에서는 쑨원(1866. 손문), 장 제스(1887. 장개석) 마오쩌둥(1893. 모택동)이 차례로 태어나면서 근•현대사를 이끌어 갈 광활한 중국의 새로운 영웅들이 출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