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저항권론 (抵抗權論)
다산은 36세 되던 1797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가게 된다. 곡산에 도착했을 때, 농민시위를 주동하고 도망 다니던 한 백성이 백성의 고통을 적은 민막(民瘼) 10여 조를 적은 소첩(訴牒)을 들고 자수해왔다. 이계심(李啓心)이란 자다. 아전들이 포박해야 한다고 청했지만 다산은 제 발로 자수했으니 달아나지 않을 것이라 하고는, 도리어 석방하면서 말했다.
수령이 밝지 못한 까닭은 백성들이 제 한 몸 돌볼 궁리만 잘해서 폐단을 들어 수령에게 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官)에서 천금(千金)이라도 주고 사야 할 것 이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실로 큰 놀라움과 감동이 몰려왔던 대목이다. 중세적 부패와 질곡을 면치 못하고 있던 당시 사회에서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렇다. 다산 스스로 양반 지배계급이며 수령으로서의 책임이 있을 텐데, 백성의 저항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권장까지 한 것은 그때 벌써 민중 저항권을 인정한 것일까?
이를 저항권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또 다른 뜻이 있을까? 이에 관하여 임형택이 다산 사상을 민주적 정치사상으로 논하면서 이계심의 경우를 ‘저항 운동’으로 보았다. 그는 이계심의 경우를 들어 “저들 민이 피지배의 억울한 처지를 이제 숙명적으로 감수만 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대결해서 밝은 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한 가닥 실마리를 다산은 농민저항의 운동 형태에서 예민하게 포착했다.”고 한다. 이런 민중운동으로부터 민을 정치적 주체로 떠올리는 현실적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다산이 민중 저항을 최소한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정성철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봉건국가의 ‘인정(仁政)’이라도 그를 집행하는 관리들의 비행 때문에 실시되지 않으니 이러한 비행을 반하는 것은 마땅하다는 견해”라면서도 “그 본질은 봉건국가의 장구한 이익을 옹호한 ‘덕치(德治)’의 표현”이라고 한다. 정성철은 북한 주체사상의 바탕 위에서, 다산 사상의 개혁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봉건성 또한 잔재해 있다는 주장이므로 민중 저항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 이다. 이계심의 경우로 보면 다산은 잘못된 관의 처분에는 민이 항의 행동을 하는 것은 옳다는 것과 나라에서 권장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하다. 이는 당시 현실로는 매우 진보적이고 획기적인 인식이다.
조광은 이계심의 경우는 들지 않았으나, 앞의 ‘혁명론’에서 이미 말했듯이 저항론과 혁명론을 같은 것으로 다루었다. 그의 저항권론은 이미 ‘혁명론’에서 소개하고 검토했다.
다산이 민중저항권을 명시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은 찾지 못했다. 민중의 참혹한 피폐와 빈궁을 들어 관리들을 혹독하게 공격한 적은 많지만, 그것을 이계심의 경우처럼 저항을 권유하거나 용인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다산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문제로 먼중들이 집단적으로 일으키는 폭동인 민요(民擾)에 관해서는 오히려 걱정하는 쪽이었다. 분명히 그 민요의 원인이 관(官)의 부패와 타락에 있는지도 다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직무를 유기하는 지방수령의 자세를 통렬히 공박하기도 했다. 그것은 실로 분노에 차 있는 듯한 인식이었다. 그러나 다산의 처는 민요(民擾)로 인한 적의 침입을 걱정하며 백성의 사기를 북돋우고 환란을 막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도리어 백성들을 잘 알아듣도록 타이르게 효유(曉諭)하고, 유언비어 퍼뜨리는 백성은 처벌하고, 돌아다니면 손해라는 걸 알려줘야 한다고 역설한다. 백성들이 관에 달려들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관(官)이 백성을 오히려 난리를 일으킨 백성을 평안하게 해주는 ‘진무(鎭撫)’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 것이다.
또한 다산의 홍경래의 난에 한 태도도 의문스러운 면이 있다. 물론 홍경래의 경우는 워낙 엄청난 사건이니, 다산이 책임 있는 지식인으로서 국가의 위기와 사회의 혼란을 우려 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당시 농민의 처지와 관리들의 부패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누구보다 더 개탄하며 분개하던 다산이었다.
그런 다산이 짓눌린 백성들의 저항인 홍경래 난 에 관한 태도는, 앞으로의 난에 비하기 위한 <민보의民堡議>를 저술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앞장서서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킺는 창의(倡義)의 통문을 짓기까지 했다. 또 집권층과 같은 입장에서 홍경래 무리를 ‘역적’, 지방에서 일어난 도둑의 무리인‘토적(土賊)’, ‘작란’, ‘모반’으로 부르고 냉랭히 힐난했다.
<통색의通塞議>에서 서북인들이 버려 진 자[서관북관西關北關 기기자야其棄者也]라고 호소했던 다산이 바로 그 서북인(西北人)인 홍경래의 거사 동기를 모를 리 없을 텐데, 자신의 평소 대민(對民) 인식과 국정의 부패를 전혀 상기(想起)치 못하고 그저 유언비어 때문으로 인식하고만 있었다. 이런 다산의 입장은 저항권과 전혀 관련이 없고, 이미 앞에서 본 혁명론과도 무관함을 알 수 있다.
조광은 홍경래의 경우에 대해 “혁명적인 새로운 지도이념이 뚜렷이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란(民亂)의 수준을 넘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홍경래 난의 성격에 대해서는, “토호․이속(吏屬)․상인층의 주도에도 불구하고 농민군의 기본 역량은 빈궁한 농민이었으며, 각계각층의 피압박민들이 여기에 망라되어 있었다.”는 해석과, 다양한 세력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동력은 농민층에 있었으나 상층 지도부가 농민층의 성장과 그 저항의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평가 등 의견이 엇갈 리지만 국가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취한 사전 준비 하에 일어난 조직적 봉기임은 틀림없다.
그냥 우발적으로 일어난 민중들의 집단적인 폭력인 민요(民擾)와는 다르다. 특정된 ‘지도이념’을 한정하는 듯한 조광의 논리는 설득력이 적다고 하겠다. 정성철이 “(다산은) 농민들에 대한 ‘동정’을 보내면서도 당시 가장 혁명적으로 진출한 농민들의 투쟁에 합류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혁명적 요구를 대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시했다.”고 지적한 것은 후술하는 것처럼 군민(君民)관계에 관한 다산의 인식에 비추어 오히려 수긍이 가는 견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