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정약용의 평등론
평등사상도 민권의 주요 내용이다. 다산의 사상을 평등사상으로 주장하는 데는 군과 민의 동질성도 있어야 하지만, 가장 가깝고도 중요한 문제가 양반(兩班)과 상민(常民)의 신분계급에 대해 다산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이다.
위에 존재하는 자는 하늘이며, 그 밑에 존재하는 자는 민중(民衆)이다.
조광은 다산의 이 말을 근거로 “중세적 신분체계 질서를 나름대로 부정하는 입장에 있다. 그는 하늘과 민중을 직결시키면서 민중 위에 군림하는 특수한 신분집단의 존재가치를 인정 하지 않고 사민평등을 강조한다.”고 했다. 금장태도 이 말이 “신분적 차별을 거부하고 평등을 강조하는 입장에 따라, 모든 인간이 하늘 아래에 평등한 이웃으로 설 수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의 세계관을 제시했다.”고 보았다.
그런데 다산의 이 말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있다. 위 인용문은 두 연구자의 번역에 따른 것인데 이 번역에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다산의 이 “상자천야上者天也 하자민야下者民也”는 <상서尙書> 요전(堯傳)의 “(帝堯의 德化는) 그 빛이 사표(四表)를 덮고 상하(上下)를 감동시킨다[광피사표光被四表 격우상하格于上下]”는 말 중의 ‘上下’에 한 주석으로서 한 말이다. 그러므로 “上은 天을 말하고, 下는 民을 말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다산은 이 말을 <상서尙書> 고요모(臯陶謨)의 ‘달우상하達于上下’에 한 채청(蔡淸)의 주석 ‘上天下民’과 달리 해석할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 말은 꼭 다산만의 것이 아니고 그 이전부터 있었던 말이다. 원(元)의 오징(吳澄)이 이 ‘달우상하達于上下’에 대해 “上은 天을 말하고 下는 民을 말한다......天은 하늘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민에 존재하여 上天과 下民이 통하고 꿰뚫어서 하나의 民이 된 것이 바로 天이다.”고 한 바 있다. 다산의 이 말은 평등이 아니라 ‘하늘과 사람’, ‘천심과 민심’을 가리키는 민 본위 사상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또 다른 근거로 많이 드는 것은 막힌 것을 뚫는 의논인 「통색의通塞議」이다.
윤사순은 이를 근거로 ‘평등의식’으로 보았고, 최익한도 “인재(人才)가 성하게 일어나는 울흥(蔚興)에 한 선결조건으로서 문벌, 계급 및 지방 차별제의 타파를 주장하였으니, 이는 그의 혁명적 민주사상의 중요한 표현”이라 하다. 「통색의通塞議」가 백성․中人․서얼․지역․당파․귀천 등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민권 주장자들도 이것이 인재 등용에 관한 다산의 건의임을 알고 있다. 인재의 등용은 능력이 있다면 어떤 차별도 하지 말고 발탁해 쓰라는 것으로, 이것을 곧바로 반상(班常)과 노비 등의 신분제 혁파로 볼 수는 없다.
다산이 직접 신분과 출신지의 차별 없이 등용된 인재로서 김일제金日磾․ 설인귀薛仁貴․ 구준丘濬․ 한기韓琦․ 범중엄范仲淹․ 소용邵雍을 실례로 들었는데, 우리는 그들의 사회를 평등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신분이나 출신지에 관계없이 폭넓게 인재를 등용하다 보면 장차 신분 혁파로까지 발전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내가 바라는 바가 있는데, 온 나라 사람들이 모조리 양반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조리 양반이 되어 버린다면 이는 곧 온 나라에 양반이란 것이 따로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될 것이다. 젊은이가 있기 때문에 늙은이가 있는 것이며 천한 이가 있기 때문에 귀한 이가 있는 것이다. 만일 모두가 다 존귀(尊貴)한 사람이 되어버린다면 이는 곧 존귀한 사람이란 것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민권이론이 평등론 주장의 근거로 삼는 「발고정림생원론跋顧亭林生員論」이다. 이를 근거로 “신분제적 질서를 부정하는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것이며, 동시에 민중에게도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적 권리가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며, 민중이 주인으로 등장하는 평등한 새로운 사회에 한 구상”으로 해석하거나, “중세적 신분제에 대한 다산의 개혁론의 절정을 이루는 구절”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다산은 이 말에 바로 이어서 관자(管子)를 인용하여, “온 나라 사람 을 다 존귀하게 할 수는 없다. 다 존귀하게 되면 일은 이루어지지도 않고 나라만 불리하게 된다.”라고 하다. 앞에서는 모두가 다 양반이 돼야 한다 하고 여기서는 다 양반이 되어선 안 된다고 했으니 얼핏 모순으로 보인다. 이 모순을 의식했음인지 김호는 “체계적인 논의의 장(場)에서는 현실적 제약을 고려하여 언제든지 후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거나, “이상론과 현실론이 갈등 구조를 이루고 있다.”며 한 발 물러서고 있다. 다산의 「발고정림생원론跋顧亭林生員論」은 평등사상의 표현이라 하기 어려울 것 같다. 관자의 말을 인용한 마지막 말이 이 한 편 글의 결론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다산의 다른 저술에서 신분계급을 없애야 한다고 한 흔적은 없다. 그리고 평등론자들은 이 말의 번역과 이해에도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또 장횡거가 “옛사람은 벗과 금슬과 서적을 얻고자 하면 항상 마음을 여기에다 두었다” 고 한데 대해, 다산이 주석하기를 “사람이 벗과 금서(琴書) 사이에서는 단아하고 삼가면서 자신을 지키기가 쉽지만, 맹인․귀머거리․벙어리․앉은뱅이․거지․비천한 자․어리석은 자를 만났을때 점잖고 공경스런 얼굴을 잃지 않고 예로써 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이 말을 두고, 다산의 인간 평등 관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맹인․귀머거리 등등과는 구별되는 위치의 유학자 입장에서 천한 그들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과 예(禮)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외에, 다산이 신분이나 지위가 높고 낮은“존비(尊卑)에 차등이 있고 상하에 법도가 있는 것은 옛 도의”라면서 수레와 복장, 깃발과 인끈에 있어 구별을 둬야 한다고 한 것도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