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유학인 주자학을 떠나 오래된 유학인 공맹의 유학과 손잡으려는 시도는 일찍이 동방 전도의 주역인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기획한 바 있다. 리치는 주자학을 신학적 지점에서 읽지 않았다.아니, 않으려 했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을 과도하게 자연학적 지평으로 밀어 놓고 나서 주자학을 비판했다. 리치의 해석에서 이(理)는 주재(主宰)로서의 영광을 박탈당했다. 이 점이 성호 문하에서 서학(西學)을 역비판하는 중요한 논거가 되었다.
안정복은 리치가 이(理)를 사물의 부차적 속성으로만 볼 뿐, 우주적 근원이나 도덕적 의미의 담지자로서의 위상을 부정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 그는 '이것은 기(氣)가 이(理)에 선행한다는 후유(後儒)의 설과 같은 것'이다. 안정복은 아마도 이기(理氣)를 보다 자연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율곡을 겨냥하고 있었을 것이다.
리치는 선교사 가운데 누구보다도 유교적 전통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나 주자학의 전통이 갖고 있는 신학적 지평을 무지로 간과하거나 혹은 고의로 무시함으로써 지식인들을 설득하고 감복시키는 데 실패했다. 신후담과 안정복은 리치의 신학적 변증에 대해 주자학의 신학으로 맞섰다.
나는 리치가 서학을 <전도>하러가 아니라 유교와 <접목>시키려 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리치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 특히 신에 대한 관념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것은 교황청도 동의하기 힘든 파격적 혁신이었겠지만 유학과 서학의 실질적 종합을 이룩했을 것이다.
예수회의 선교가 실패한 이유는 중국의 문화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교황청의 태도 때문이라는 진단이 일반적이다. 예컨대 '트레드골드는 17, 18세기의 예수회는 중국을 개종시킬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면서, 만일 교황청이 유교의 관습과 절충하려는 예수회의 방식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서양의 자연과학으로 인기가 높아진 예수회의 선교 활동은 중국적인 그리스도교 문명을 창출하였을지도 모른다.(D. Treadgold, The West in Russia and China, 베이커, <조선후기 유교와 천주교의 대립>, 28쪽)라고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교황청이 천주(天主)라는 용어와 제사(祭祀) 문제를 적응적으로 접근했더라도 카톨릭이 적어도 조선의 유교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자학의 이(理)의 자연 신학에 경건히 귀기울여야 했다.
다산 또한 리치의 관점에 서서 이기론(理氣論)을 비판했다. 이 점에서 서학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금장태 교수는 이 점을 일관되게 강조해 왔고, 최근 송영배 교수는 <천주실의>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측면을 재삼 확인했다.(송영배 외역, <천주실의>, 서울대출판부 참고) 그 점은 숨길 수 없다. 일단 이렇게 정돈할 수 있다. 다산은 주자학을 떠났지만 그것은 주기(主氣)의 자연학적 관점에서이지, 주리(主理)의 신학적 관점에서는 아니다. 이 과정에서 다산은 리치의 논법에 크게 의존했다.
그렇다고 다산이 리치의 신학으로 이동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산은 세계를 주재(主宰)하고 안양(安養)하며, 실질적으로 감독하는 상제(上帝)를 뚜렷이 내세웠다. 이 점에서 서학의 천주(天主)와 닮아 있다. 다산은 그러나 리치처럼 상제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변증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는 <논리>가 아니라 <직각>에 의존했다.
인간의 도덕적 감정과 선한 의지, 바로 그것이 이기와 욕망의 세계에서 역사(役事)하는 상제(上帝)의 분명한 증거라고 말했던 것이다. 아울러 상제(上帝)는 자신의 감정과 의지에 좌우되지 않는 공평무사하고 도덕적인 존재이다. 그는 자신을 향해 <경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상제는 인간을 시험하지 않는다. 욥의 고난을 인위적으로 설정하거나, 자신을 위해 자식을 번제로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상제는 자신의 존재를 오직 각각의 도덕감과 선의지를 통해서만 드러나므로 그 <명령>을 거스리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 상제를 경배하는 단 하나의 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초월적 상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상제의 거소는 사원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다산은 어느덧 유학으로 돌아와 있다. 예를 들면, 다산은 내세의 존재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하지 않았다. 복선화음(福善禍淫)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주로 <도덕감의 발양으로 인한 내적 충족감>, 이를테면 <대학>에서 말하는 심광체반(心廣體胖)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연 사후의 보상이나 형벌을 내심 믿었을까. 믿으면서도 혐의가 두려워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가 경학을 통해 공맹의 유학과 만났다면 사후의 세계를 믿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학은 이기적 동기에 의한 행위를, 그것이 설사 초월자에 대한 경배요 헌신이라 하더라도, 신뢰하지 않는다. 주자학자들이, 특히 퇴계의 주리 계열에서 서학의 신학적 입장에 일정 부분 동의하더라도 종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기적 목적에서, 일상을 떠나, 신에 아유(阿諛)하는 것>이었고, 그 집약이 바로 <사후 영혼의 심판과 천당지옥의 갈림길>이었다. 서학 쪽에서는 다산이 이를 믿고 종부성사를 했다고 하고, 유학 쪽에서는 그런 기록이 없다고 맞선다. 사실이 어느 쪽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나는 다산이 그것을 믿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요컨대 명목에 잡히지 않고 실질을 살필 때, 다산은 주자학을 떠나면서도 주자학으로 돌아왔고, 서학에 기울면서도 서학을 벗어났다. 그렇다면 그는 주자학자이면서 주자학자가 아니고, 천주학자이면서도 천주학자가 아닌 셈이다. 어떤 사상이든 하나의 이름으로 단선적으로 정위되지는 않는 법이다. 단순한 사실에서 복합적 사유에 이르기까지 평면적 이름은 입체인 실상을 전해 줄 수 없다. 다산의 사상은 활간(活看)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그를 어느 편으로 끌어들일 것인지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그의 모색과 실험을 통해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모색하고, 상호 인정과 화해 위에 새로운 종교를 기획해 보는 전진적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