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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08 15:39
<천주집> “죽든 살든” 출사 결심.다산, 은거하던 이승훈 찾아가 “숨지 말고 나갑시다”
 글쓴이 : 게리
 

신앙은 포기 안한 채… 정조와 희정당서 

만난 뒤 “죽든 살든” 출사 결심


<27> 은거의 뜻을 접다

 채제공 우의정 등극 극적반전에 
 반목하던 이기경도 꼬리 내리며 
 “애초에 아무일도…” 긴 사과 편지 
 다산, 3월 반시에 수석 차지하자 
 임금이 다산을 따로 불러 대화 
 ‘천주교 신앙 묵인’ 암시 있었나 
 詩에 본격적인 출사 결심 비쳐 
 반교 김석태 위한 이례적 제문이 
 그와의 끈끈했던 관계 짐작게 
 다산, 10인의 신부였다는 증거로 
다산의 문집 '여유당전서'에 실린 '제숙보문'(왼쪽 끝부분). ‘숙보’, 곧 정미반회사가 일어났던 곳의 집주인 김석태를 
애도하는 글이다. 천주교 관련 기록을 찾기 어려운 가운데 김석태와의 깊은 친분을 대놓고 드러낸 
이 기록은 천주교에 대한 다산의 열망을 상징한다.
 이기경에게 보낸 다산의 사과 편지 

홍낙안의 직격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1788년 1월 7일의 인일제(人日製)에서 2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임금은 따로 다산을 불러 격려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홍낙안은 무시당했다.

세 해 뒤인 1791년 이기경과 다산이 다시 전면전을 펼쳤을 때 상중의 이기경은 이른바 초토신(草土臣) 상소를 올렸다. 이 글 속에 당시의 일이 나온다. 반교집회에 함께 있던 강이원과 또 다른 진사 성영우가 자신을 찾아와, 정약용이 그대에게 유감이 있다고 하면서, 과거장에서 명성을 다투던 처지라 시기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퍼뜨렸다고 말하더란 얘기를 전했다. 이기경은 “내 마음은 그를 사랑하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더란 말인가?” 하며, 자신의 진심을 내보이는 뜻에서 일부러 인일제에 응시하지 않았다.

다산은 이기경이 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다산은 앞서의 은근한 협박 편지에 이어 이기경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이때 다산이 보낸 편지는 전문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이기경의 상소문 속에 “근래 이리저리 더 물어보고서야, 형께서 한 말이 누구를 향하고 아무개를 향하였고, 또한 ‘반회’라는 두 글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소. 더더욱 그대가 우리나라의 인물인 줄을 믿게 되어, 이 같은 속마음을 털어 놓는 것이오”의 구절과, “이왕 나를 한번 버렸으니, 두 번 버리는 것이 무에 어렵겠소. 청컨대 다시 거두어 주시구려”라는 한두 대목만 남아있다.

이 말대로라면 다산은 자신이 이기경에게 오해를 거두었고, 이에 정식으로 사과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던 셈이다. 다산은 더 이상의 확전을 원치 않는다는 명확한 의사를 한 번 더 밝혔다. 이기경은 다산의 이 편지가 어쩔 수 없어 임시방편으로 한 사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했다.

 이기경의 답장 

이 일이 있은 직후인 2월에 채제공이 우의정에 올랐다. 대부분의 남인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던 상황에서 극적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기경으로서는 다산을 더 건드려 득될 것이 하나 없었다.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이기경은 2월에 다산의 앞선 두 통의 편지에 대해 아주 긴 답장을 썼다.

“근래의 일이야 어찌 일이라 할 만한 일이 있겠소. 일이 있은 뒤에 큰 일인지 작은 일인지를 논할 수 있을 텐데, 애초에 일이라 할 만한 일이 없었으니 다시금 어찌 일이 많겠소. 이른바 일이란 것을 내가 알고 있소. 이것은 중간 사람이 내 이야기를 얽어 분주하게 양민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애쓴 것에 지나지 않소.”

우리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했다. 앞서 다산의 사과 편지에 대한 화답이다. 중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문제를 만든 것이지 자신은 실제로 다산에게 해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한 말을 하나하나 적시하며, 만약 이 말 외에 다른 말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면 어떤 나무람도 달게 받겠노라고 했다. 그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정 아무개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혹 그 책을 들춰 보았지만, 근래에는 벗어났으므로 나의 우정은 전날과 한 가지다.” 이어 자신이 다산에게 준 그간의 충고는 오래 고심한 충정에서 나온 것이지 해코지 하려는 뜻이 아님을 길게 설명했다. 편지의 끝 대목은 이렇다.

“근래의 일은 혹 우리만 알고 남은 모른다고 했는데도, 우리의 동정 하나하나를 남들이 먼저 알고 있소. 이제부터는 굳이 남이 모르게 하려 하지 않겠소. 단지 남이 모두 알게 해서 내게 손해 없기를 구함이 좋을 성 싶소.”

당시는 양측 모두 총력을 다해 여론전을 펼치던 상황이었으므로, 다산에게 더 이상 언론 플레이를 하지 말고, 자신의 진심을 알아 줄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홍낙안의 대책문이 불발되고, 다산이 높은 등수를 얻은 데다, 그의 우군인 채제공이 우의정에 오르자, 형세가 크게 불리함을 깨달은 홍낙안과 이기경 측이 슬쩍 꼬리를 내림으로써 정미반회의 일은 그럭저럭 무마되어 큰 소동 없이 가라앉고 말았다.

 김석태를 애도함 

앞서 말했듯 당시 천주교의 서울 본부는 난동과 반교 두 곳에 있었다. 이중 반교는 정미반회사가 일어난 김석태(金石太ㆍ다산은 ‘錫泰’로 썼다)의 집이었다.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김석태가 세상을 떴을 때 다산이 그를 위해 지은 제문이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다. ‘제숙보문(祭菽甫文)’이 그것이다. 다산은 숙보가 반촌주인(泮村主人) 김석태의 자라고 썼다. 그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데 다산의 제문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

지극 정성 하늘 뚫고

지극한 정 땅과 통해.

나를 위해 잠을 깨고

날 위해서 잠들었지.

가정에는 소홀해도

날 위해선 꼼꼼했고,

세상일엔 느렸어도

내 일에는 재빨랐지.

내 잘못을 지적하면

크게 성내 칼 뽑았고

나 좋다는 사람에겐

그를 위해 몸 바쳤네.

혼마저도 배회하며

내 곁에 여태 있네.

저승 비록 멀다 하나

가서도 날 생각하리.

至誠徹天 至情徹地(지성철천 지정철지)

寤爲余寤 寐爲余寐(오위여오 매위여매)

闊于家室 而爲余密(활우가실 이위여밀)

慢于趨逐 而爲余疾(만우추축 이위여질)

余咎人摘 拔劍大嗔(여구인적 발검대진)

人與余好 爲之糜身(인여여호 위지미신)

魂兮遲徊 尙在我側(혼혜지회 상재아측)

九原雖邃 逝將相憶(구원난수 서장상억)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이나 사실을 남기지 않고 검열했던 다산이 김석태의 제문을 남긴 것은 이례적이다. 둘 사이가 그만큼 끈끈했다는 증거다. 반촌 김석태의 집은 천주교 교리 공부를 위해 어쩌다가 임시로 잠깐 빌려 쓴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중요한 결정이 이뤄지던 중심 공간이었고, 김석태는 그곳을 지키면서 다산의 보좌 역할을 맡았던 충직한 집사였다. 다산이 10인의 신부 중 한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또 다른 증거다.

김석태는 지성으로 다산을 도왔다. 다산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다산을 해코지 하려는 사람에겐 성을 내며 칼을 뽑기까지 했다고 썼다. 죽은 그의 넋이 여태도 자신의 주변을 떠돌고 있다든지, 저승에 가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할 것이라든지 하는 표현은 두 사람의 농밀했던 정의 자취를 잘 보여준다. 김석태는 한국천주교회가 기억해야 할 이름 중에 하나다.

천주교 문제가 제기됐음에도 정조는 다산을 희정당으로 불러들여 출사를 명했다. 정조는 천주교 문제를 묵인해준 것일까. 
문화재청 제공

 출사의 결심 

다산은 여전히 천주교 신앙과 과거 응시 사이에서 깊이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달 뒤인 3월 3일에 치른 반시(泮試)에서 다산이 수석을 차지했다. 임금은 이때도 다산을 따로 불러 은혜로운 말씀을 내렸다. 당시 희정당에서 임금을 뵙고 물러나며 쓴 시가 ‘삼월 삼일 희정당에서 임금을 뵙고 물러나와 짓다(三月三日熙政堂上謁, 退而有作)’이다.

새벽빛 물시계를 재촉하는데

문창성이 자미원을 가까이했네.

글재주 잗단 기량 부끄럽건만

관원에 견준대도 드문 은혜라.

꽃 버들에 임금 수레 옮기실 적에

바람 구름 백의에 감돌았었지.

임금 말씀 폐부를 깊이 적시니

살든 죽든 돌아간다 감히 말하랴.

曙色催銀漏(서색최은루)

文星近紫微(문성근자미)

技慚雕繪小(기참조회소)

恩比搢紳稀(은비진신희)

花柳移紅輦(화류이홍련)

風雲繞白衣(풍운요백의)

玉音淪肺腑(옥음륜폐부)

生死敢言歸(생사감언귀)

1,2구는 수석으로 뽑혀 서광이 비치면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게 된 기쁨을 말한 것이다. 따로 불러 격려를 주신 것에 대한 감격이 3,4구다. 임금은 폐부를 적시는 은혜로운 말씀을 내게 주셨다, 그러니 이제는 죽든지 살든지 감히 돌아가 은거하겠다는 말을 드릴 수가 없게 되었다고 했다.

시의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날 은혜로운 말씀이 계셨으므로, 비로소 벼슬길에 나갈 결심을 했다.(是日有恩言, 始決意進取.)” 정조는 다산의 의중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날 수석 합격으로 회시(會試)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자, 다산을 따로 불러 어서 벼슬길에 올라 자신을 도우라는 옥음(玉音)을 내렸고, 이에 감격한 다산이 비로소 은거의 결심을 접고 벼슬길에 본격적으로 나아갈 결심을 했다는 내용이다.

정조가 이날 내린 은혜로운 말씀은 그 내용이 궁금하다. 다산의 천주교 신앙을 묵인하고 벼슬길을 병행할 수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다산은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벼슬길에 진입하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더없이 큰 임금의 사랑에 감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산은 1788년 8월의 도기(到記)에서 한 번 더 불합격했다. 다산과 그럭저럭 갈등을 봉합했던 이기경은 8월 26일, 다산이 탈락한 도기에서 수석으로 합격해 곧장 전시(殿試)로 나아갔다. 여기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길이 엇갈렸다.

신성모독죄 혼란에... 다산, 은거하던 

이승훈 찾아가 “숨지 말고 나갑시다”


<28> 이중 행보

'추국일기' 속 1801년 2월 18일자 이승훈 공초 기록. 이승훈은 1789년 11월 북경에 보낸 편지가 자신이 
쓴 게 아니라 정약용이 자신의 이름을 도용해서 보냈다고 진술했다. 당시 신성모독죄 해결이 주요 이슈였다.
 비만 오는 세상 길 

다산은 1788년 3월의 출사 결심 이후, 5월 1일에는 2년 전인 1786년 5월 11일에 갑작스레 세상을 뜬 왕세자 사망의 책임을 물을 것을 요청하는 연명 상소에 이름을 얹었다. 탈상이 코앞에 있었다. 2년 전 약방과 의원은 홍역으로 인한 왕세자의 열기를 다스리지 못했다. 1786년 5월 30일과 6월 21일 당시에도 다산은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이름을 올렸었다. 당시 약방 제조, 즉 방약방의 책임자는 서명선이었다.

서명선이 누군가? 1780년 홍국영 몰락 직후 채제공을 직격했던 소론의 영수였다. 상소는 약방 의원보다 서명선을 겨냥한 정치적 성격이 짙었다. 1786년 6월 11일 정조는 오히려 서명선에게 “지난 번 상소가 번갈아 나온 것은 그들이 기회를 틈타 흔들어보려는 꾀임을 훤히 볼 수 있었다”고 말하며 잇단 처벌 요구를 묵살했다. 이것이 1788년 5월 1일에 죽은 세자의 탈상을 앞두고 다시 쟁점화되었고, 다산은 이 상소에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출사 결심의 첫 행보를 알렸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교회 내부의 사정도 골치 아팠다. 다산은 교회 일보랴, 과거 공부하랴 분주했지만 어느 하나 신통한 것은 없었다. 이 때 지은 시 ‘고우행(苦雨行)’은 괴로운 장맛비에 심사를 얹어 답답한 교착 상황을 토로했다.

괴로운 비, 괴로운 비, 그치잖코 내리네

불씨도 다 꺼져서 동네 사람 근심 겹다.

아궁이에 물이 나서 깊이가 한 자인데

어린 아들 오더니만 나뭇잎 배 띄우누나.

네 애비도 너만 할 땐 똑 그렇게 놀았나니

고개 들어 화내려다 외려 절로 부끄럽다.

내 이제 책 베끼며 문밖을 안 나섬은

기운 빠진 때문이지 공부 잘됨 아니로다.

苦雨苦雨雨不休(고우고우우불휴)

煙火欲絶巷人愁(연화욕절항인수)

竈門水生深一尺(조문수생심일척)

穉子還來汎芥舟(치자환래범개주)

迺翁當年所不免(내옹당년소불면)

擧頭欲嗔還自羞(거두욕진환자수)

我今鈔書不出戶(아금초서불출호)

良由氣衰非學優(양유기쇠비학우)

세상 길을 나서려 해도 비 때문에 못 나간다. 아궁이에 물이 한 자나 들어차서 밥도 짓지 못한다. 할 수 없이 틀어박혀 책을 베껴 쓰는 초서(鈔書) 작업을 한다. 공부가 잘 되어서가 아니라,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다. 멋모르고 나뭇잎 배를 띄우며 신난 어린 아들을 지켜보는 눈길만 안쓰럽다.

 계산촌으로 이승훈을 찾아가다 

다산은 광중본 ‘자찬묘지명’에서 자기 입으로 “정미년(1787) 이후 4, 5년간 서학에 자못 마음을 기울였다(丁未以後四五年, 頗傾心焉)”고 했다. 1788년 당시는 물론 이후로도 3, 4년간은 천주교의 핵심부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했다는 뜻이다.

1786년 가성직제도 시행 이후 천주교의 교세는 폭발적 성장을 보였다. 초기 이벽과 이승훈, 다산 형제와 권일신 등 몇 사람에 의해 출발했던 것이 1789년에는 1,000명을 넘어섰다. 1787년 봄 10명의 신부 중 한 사람이 ‘성교절요(聖敎切要)’ 등의 교리서를 공부하다가 주교에 의해 사제 서품을 받지 않고는 미사와 성사 집전을 할 수 없고, 한다면 이는 독성죄(瀆聖罪), 즉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 그에 의해 이 문제가 난동과 반교의 집행부 모임에서 정식으로 상정되었고, 이후 이들은 대단히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성사 집행이 즉각 중단되었다. 미사도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미사 폐지는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을 빼앗고, 구원의 희망을 꺾는 일이라 하여 당분간 계속하기로 했다. 성사가 중단되면서 교우들이 동요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이 문제에 대해 중국 교회에 권위 있는 해석을 청해야만 했다. 하지만 보낼 인편과 비용 마련이 쉽지 않았다. 집행부 내부의 의견도 갈리면서 혼선을 빚었다.

이 같은 고민의 와중에 1788년 9월 초, 다산은 천주교와 과거 준비에서 도망치듯 문암산장으로 갔다. 해마다 가을걷이를 위해 문암에 머물곤 했으니 특별하달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때 다산의 행보는 조금 이상했다. 다산은 문암에 도착한 직후, 당시 계산촌(鷄山村)에 머물고 있던 자형 이승훈을 만나러 갔다. 계산촌은 문암산장에서 멀지 않은 양주 사기막골 인근 굴운역(窟雲驛) 근처에 있었다.

 숨지 말고 나갑시다 

당시 이승훈은 어째서 서울 아닌 이곳에 머물고 있었고, 다산은 왜 그를 찾아갔을까? 이승훈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다산은 시 한 수를 남겼다. 제목은 ‘남일원으로부터 배를 타고 문암장으로 돌아오며(自南一源乘舟還門巖莊)’란 작품이다. 남일원은 다산의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에서 벽계(檗溪) 인근에 있던 1,000그루의 밤나무로 이름났던 마을이라고 적었던 곳이다. 시의 부제가 ‘이때 계산으로 이형을 찾아갔다(時于雞山訪李兄)’이다. 이승훈이 1801년 천주교 문제로 처형당했기 때문에, 다산은 문집에서 이승훈을 말할 때 그의 이름을 적지 않고 꼭 이형이라고만 썼다.

맑은 밤 술상 앞서 술잔 나누며

만년에 함께 살자 약속을 했지.

단풍나무 아래서 채찍 들고서

흰 구름 언저리로 노를 젓누나.

모용(茅容)의 뜻 지닌 줄은 진작 알았고

이필(李泌)의 어짊 갖춤 마침내 아네.

산림은 하늘조차 아끼는 바라

어이해 티끌 인연 사절하겠소?

對飮酬淸夜(대음수청야)

連棲約晩年(연서약만년)

拂鞭紅樹裏(불편홍수리)

移櫂白雲邊(이도백운변)

已識茅容志(이식모용지)

終知李泌賢(종지이필현)

山林天所惜(산림천소석)

那得謝塵緣(나득사진연)

둘은 모처럼 만나 술잔을 나눴고, 늙어서는 이곳에서 이웃이 되어 살자고 다짐했다. 지금은 할 일이 많으니 아니라는 뜻이다. 5, 6구의 의미는 이렇다. 모용은 동한(東漢) 때 효자였고 뒤늦게 글을 배워 덕망 높은 선비가 되었다. 이필은 당나라 때 네 임금을 섬겨 재상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모용을 말했으니 이승훈이 이때 부모를 모시기 위해 그곳에 내려갔던 듯 하고, 다산은 그가 이필처럼 끝내 과거를 보아 여러 임금을 섬기는 어진 신하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게리 19-05-08 15:41
 
7, 8구는 묘한 말이다. 숨어사는 산림처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티끌 세상의 인연을 끊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고 했다. 당시 이승훈은 아예 속세의 인연을 끊고 완전히 은거할 작정으로 계산촌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출사를 결심한 자신의 의지를 밝히며 그의 뜻을 돌리려 했던 듯하다.

여기서 생각이 조금 복잡해진다. 당시 이승훈은 가성직 제도 하의 천주교단에서 간판 격인 인물이었는데, 교회 일로 동분서주해도 시원찮을 그가 어쩐 일로 산골에 처박혀서 아예 바깥 세상으로 안 나갈 작정까지 하게 되었던가? 교단 내부에 알지 못할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사실 이승훈의 처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가 많았다. 그는 일이 생기면 공개적으로 시문까지 지어가며 배교를 선언했고, 얼마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며시 돌아오곤 했다. 없는 말을 만들거나 다른 사람을 끌고 들어가는 행동도 서슴지 않아 신뢰를 점차 잃었다. 이때 다산은 갈등을 빚고 교회를 벗어나있던 자형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갔던 것은 아닐까? 교회는 유일하게 중국 천주당에서 공식적으로 영세를 받았던 이승훈의 아우라가 필요했을 것이다.

- 북경 특사 파견과 위조 편지 -

조선 천주교회는 1789년과 1790년 당면한 독성죄 자체 고발로 봉착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북경 교회에 두 차례에 걸쳐 특사를 파견했다. 1789년 10월 윤유일(尹有一)은 조선 교회가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서한을 옷 속에 누벼서 거액의 뒷돈을 주고 동지사 일행에 장사꾼으로 끼어들어 떠났다. 옷 속에는 이승훈의 편지와, 애초에 문제를 제기했던 유항검으로 추정되는 이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 편지들은 한문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현재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번역문이 보존되어 있다. 편지에서 이승훈은 당시 조선 교회가 처한 심각한 고민을 토로하고, 자신들이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원을 썼다.

그런데 훗날 1801년 2월 18일, 이승훈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을 적에 이상한 말을 했다. ‘추국일기(推鞫日記)’ 속에 들어있는 이승훈의 공초 기록을 보면, 이승훈은 “1790년 무렵 정약용이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과 함께 제 이름을 빌려 북경의 서양인들과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심지어 1795년에도 그의 심부름꾼인 지홍(池洪)과 윤유일을 시켜 천주교의 전법기물(傳法器物)을 가져오게 해서 정약용의 집에 보관하였노라고 고발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당시 이 편지 위조 사실을 자신이 고발하려 하자, 정약용이 “조정에서도 이미 모두 환히 아는 사실이니 제발 고발하지 말아 달라”고 자신에게 애걸했다는 말도 보탰다. 심문관은 네가 주고받은 편지가 분명한데 어찌 정약용에게 떠넘기느냐고 다그치자, 이승훈은 다시 “정약용이 서찰을 위조해서 제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저는 실로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라고 한번 더 발뺌했다. “정약용 삼형제가 제 이름을 빌려서 서양인과 교통하는 섬돌로 삼았다”고도 말했다. 처남 매부 사이였던 이들은 막판에 이르러서는 거의 막장 드라마 수준까지 갔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게리 19-05-08 15:45
 
다산, 10인의 신부였다는 증거로.;;;
게리 19-05-08 15:47
 
숨지 말고 나갑시다;;;.
겨울 19-05-08 15:55
 
홍낙안의 직격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1788년 1월 7일의 인일제(人日製)에서 2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임금은 따로 다산을 불러 격려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홍낙안은 무시당했다.
겨울 19-05-08 15:57
 
당시는 양측 모두 총력을 다해 여론전을 펼치던 상황이었으므로, 다산에게 더 이상
언론 플레이를 하지 말고, 자신의 진심을 알아 줄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겨울 19-05-08 16:01
 
다산은 교회 일보랴, 과거 공부하랴 분주했지만 어느 하나 신통한 것은 없었다.
이 때 지은 시 ‘고우행(苦雨行)’은 괴로운 장맛비에 심사를 얹어 답답한 교착 상황을 토로했다.
소소한일상 19-05-08 17:57
 
다산, 10인의 신부였다는 증거로
소소한일상 19-05-08 17:59
 
‘반회’라는 두 글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소. 더더욱 그대가 우리나라의 인물인 줄을 믿게 되어, 이 같은 속마음을 털어 놓는 것이오”의 구절과, “이왕 나를 한번 버렸으니, 두 번 버리는 것이 무에 어렵겠소. 청컨대 다시 거두어 주시구려”라는 한두 대목만 남아있다.
소소한일상 19-05-08 17:59
 
“정 아무개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혹 그 책을 들춰 보았지만, 근래에는 벗어났으므로 나의 우정은 전날과 한 가지다.” 이어 자신이 다산에게 준 그간의 충고는 오래 고심한 충정에서 나온 것이지 해코지 하려는 뜻이 아님을 길게 설명했다.
소소한일상 19-05-08 18:02
 
반촌 김석태의 집은 천주교 교리 공부를 위해 어쩌다가 임시로 잠깐 빌려 쓴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당시 조선천주교회의 중요한 결정이 이뤄지던 중심 공간이었고, 김석태는 그곳을 지키면서 다산의 보좌 역할을 맡았던 충직한 집사였다. 다산이 10인의 신부 중 한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또 다른 증거다.
소소한일상 19-05-08 18:02
 
김석태는 한국천주교회가 기억해야 할 이름 중에 하나다.
소소한일상 19-05-08 18:04
 
교회 내부의 사정도 골치 아팠다. 다산은 교회 일보랴, 과거 공부하랴 분주했지만 어느 하나 신통한 것은 없었다. 이 때 지은 시 ‘고우행(苦雨行)’은 괴로운 장맛비에 심사를 얹어 답답한 교착 상황을 토로했다.
소소한일상 19-05-08 18:06
 
미사 폐지는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을 빼앗고, 구원의 희망을 꺾는 일이라 하여 당분간 계속하기로 했다. 성사가 중단되면서 교우들이 동요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이 문제에 대해 중국 교회에 권위 있는 해석을 청해야만 했다.
소소한일상 19-05-08 18:07
 
모용을 말했으니 이승훈이 이때 부모를 모시기 위해 그곳에 내려갔던 듯 하고, 다산은 그가 이필처럼 끝내 과거를 보아 여러 임금을 섬기는 어진 신하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산백초 19-05-08 21:04
 
다산은 이기경이 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다산은 앞서의 은근한 협박
편지에 이어 이기경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이때 다산이 보낸 편지는 전문이 남아있지 않다.
산백초 19-05-08 21:05
 
다산은 여전히 천주교 신앙과 과거 응시 사이에서 깊이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달 뒤인 3월 3일에 치른 반시(泮試)에서 다산이 수석을 차지했다.
산백초 19-05-08 21:08
 
1786년 가성직제도 시행 이후 천주교의 교세는 폭발적 성장을 보였다. 초기 이벽과 이승훈,
다산 형제와 권일신 등 몇 사람에 의해 출발했던 것이 1789년에는 1,000명을 넘어섰다.
늘배움 19-05-09 08:22
 
이 일이 있은 직후인 2월에 채제공이 우의정에 올랐다. 대부분의 남인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던 상황에서 극적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늘배움 19-05-09 08:24
 
앞서 말했듯 당시 천주교의 서울 본부는 난동과 반교 두 곳에 있었다. 이중 반교는 정미반회사가 일어난
김석태(金石太ㆍ다산은 ‘錫泰’로 썼다)의 집이었다.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김석태가 세상을 떴을 때
다산이 그를 위해 지은 제문이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다.
늘배움 19-05-09 08:27
 
이승훈이 1801년 천주교 문제로 처형당했기 때문에, 다산은 문집에서 이승훈을 말할 때 그의 이름을 적지 않고 꼭 이형이라고만 썼다.
사오리 19-05-13 04:37
 
등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다. 죽지못해 고뇌할때 등을 밀어준 사람이 있다.
그 등을 밀어준 사람을 한낱 자신의 이익을 위해 등질때 단장의 아픔을 느
낀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곽란 때문에 밤새 고생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그에게도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수없
이 반복됐다. 등을 밀어준 사람은 내면의 근육이 커진다. 그러나 등진 자
의 앞날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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