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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0-23 22:00
'진주 검무'에 서린 논개의 혼, 성계옥 명무
 글쓴이 : 흰두루미
 







'명인명창 이야기'는 네티즌들에게는 낯선 분들이 많고, 내용도 생소한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우리 문화 지킴이'들을 위하여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진주 검무>의 명인 성계옥 명무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동경잡기」에 전하는 '검무(劍舞)'의 유래는 매우 비장하고 전투적입니다.

“황창랑은 신라 소년으로 7세의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적국인 백제에 들어 가 칼춤으로 이름을 날렸다.
백제왕이 소문을 전해 듣고 그를 불러 검무를 보았는데, 황창랑이 기회가 왔다 하고 검무를 추다가 드디어 백제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 황창랑 또한 잡혀 죽었다.
신라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의 용모와 닮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그의 춤을 모방하여 추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하는 검무이다.”


이러한 사연을 담은 검무는 ‘전복(戰服)’을 입고, ‘전립(戰笠)’을 쓰고, 가면을 쓰고, 진짜 칼을 들고, 남성적인 활달한 춤을 추는 무사들에 의해 오랫동안 추어져 왔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어느 틈엔지 기생들이 우아하고 아름답게 추는 춤으로 바뀌었는데, 어떤 사연으로 검무가 그렇게 변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검무는 민속무용의 형태로 남게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진주 검무>는 그 춤가락이나 칼 쓰는 법이 궁중에서 추어지던 검무의 원형을 가장 많이 닮고 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검무로 꼽히고 있습니다.

성계옥 명인은 이 <진주 검무>의 보유자이자 계승자였고, 후원자이고, 교사였습니다.
 
전통예술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가 만연한 땅에서 진주 검무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스승과 동료들과 제자들의 숨은 노력과, 그들을 한 끈으로 묶어 놓을 수 있었던 그녀의 희생과 열정과 통솔력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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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무를 추는 성계옥 명인.

그러나 그녀가 진주 검무와 인연을 맺기까지에는 한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1927년 4월 29일에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의 시골 마을에서 성갑주씨의 육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난 그녀는 영특하고 지혜로운 어린 소녀로 주위에서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대지주이자 유학자였던 그녀의 부친이 독립운동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헌병대에 끌려 가 고문을 당한 뒤 신경쇠약증에 걸리자 온 집안이 수라장이 되고, 그 통에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그녀는 진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춤추고 노래하는 개화학교에 딸을 보낸다고 반대했던 어머니도 그녀가 모든 면에서 우수한 학생임을 알고 자랑스러워 했고, “속이 맑고 영리한 아이라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일을 했을텐데”하고 대견스러워 하던 아버지도 학교에 진학 못시킨 것을 후회할 만큼 영특했던 그녀는 질질 짜고 우는 대신, 동경에서 보내오는 강의록을 스승 삼아 중등학교 과정을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19살에 동경 의전을 나온 김상식씨와 결혼한 뒤에도 공부를 계속해서 21살에 준교사 시험에 합격할 만큼 그녀의 향학열은 대단했습니다. 

이렇듯 엄격하고 학구적인 성품의 그녀는 어느 봄날, 엉뚱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결혼하고 일 년이 넘도록 신랑 얼굴도 마주 못 보고 밥 묵을 때도 신랑이 쳐다보마 부끄러버 밥이 안 넘어가는 새색씨였는데, 어느 봄날에 동네 여자들이 뒷산에 모여서 야유회를 하는데 내는 새댁이라 끼지도 몬했지.
여자들이 술 마시고 장구 치고 춤을 추면서 노는데, 내가 불을 때다가 부지깽이를 들고 뒷마당에서 그걸 잠깐 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넋을 잃고 한창 바라보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춤을 따라 춘 기라.
내 평소 성격 상 도저히 허용이 안되는데 우째서 그랬는지 지금도 몰라. 그때 그걸 남편이 본 기라. 싱긋 웃더니 ‘그렇게 추고 싶으모 놀러가지’하는데 우째 부끄럽던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제.”

선비의 딸이 체통머리없는 행동을 했다고 스스로 한동안 근신할 만큼 '단정한' 그녀였던지라, 그런 이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본능적인 ‘끼’가 몸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그 ‘끼’를 용납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뒤로도 한참동안 단정한 가정 부인의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그러다가 26살이 되었을 때, 남편이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다가 익사하는 슬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청천에 벽력이었제. 한동안 식음도 전폐하고 드러누워 있었는데, 그러다가는 시어머님과 애들이 굶게 안 생겼나. 마침 준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을 수 있었지.
교원 생활을 하던 중에 강기례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이는 진주 권번 출신으로 명무라. 자기집에 교습소를 차려놓고 춤을 가르쳤는데, 방학 때면 한달씩 가고 평소에는 시간나는 대로 가서 배우는데 춤만 추면 모든 고통이 싹 가셔지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기라.
아마 내가 사주에 ‘천예(天藝)’가 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우쨌든 그때부터 예술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제.”

강기례 명인에게 승무와 한량무를 배운 뒤 가야금 산조도 배우면서 차츰 예술의 맛을 알아갈 무렵, 또다시 그녀에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지주의 집안이라 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고 부친이 돌아가시는 통에 순식간에 몰락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친정 망하고 남편 잃고 전쟁의 고생살이가 겹쳐서 그녀는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삼 년 동안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며 약해진 몸을 악착같이 회복시킨 그녀는 자식들과 살아갈 길을 궁리한 끝에 시골에 남아 있던 논을 팔아서 진주 시내에 조그마한 밥집을 차렸습니다.

혼자서 백반도 만들고 비빔밥도 만들어 정갈하게 상을 차린 정성의 덕으로 차츰 손님이 많아져서 나중에는 “손님끼리 박치기를 해서 이마가 붓기도 할 만큼”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춤을 배우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장사를 하는 틈틈이 승무도 배우고, 살풀이춤도 배우고, 가야금 산조도 배우며 한을 풀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한 십 년쯤 지난 뒤에야 드디어 <진주 검무>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마흔 살이 좀 넘었을 때인데, 하루는 진주 검무 보유자이던 김자진 선생이 찾아와서 검무가 문화재로 지정돼서 전수자를 기를라꼬 하는데 해보겠냐고 하는 기라.
두말없이 따라가서 남강 옆에 세워진 문화원에 다니면서 하루에 한 시간씩 배웠제.
검무 선생님으로 이윤례, 최예분, 이음전 이런 분들이 계셨는데, 그 분들이 추는 검무는 그 분들의 스승인 최순희 선생님에게서 배운 기라.“

최완자라고도 불리는 최순희 명인은 '진주 교방'의 동기였다가 13살 때 중앙의 '장악원'에 뽑혀 예술 교육을 받은 뒤, 궁중에 들어 가 고종 황제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25살 때 진주 교방으로 낙향하여 권번에서 진주 기생들의 필수 과목인 검무를 가르쳤습니다.

조선조 말의 유학자인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진주 기생 산홍이가 검무를 잘 춘다는 소문을 듣고 내무대신 이시홍이 천금을 주고 산홍이를 사겠다고 하자,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이지만 오적의 두목에게 몸을 팔지 않겠다’고 말해 크게 노한 이시홍이 그녀를 때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걸로 보아 이미 진주에는 기생들에 의해 검무가 추어지고 있었는데, 그 유래를 논개의 죽음에서 찾는 이가 많습니다.

진주 기생 논개가 왜군 장수의 몸을 끌어 안고 의암이라는 바위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빠져 죽자 그 순절을 기려 해마다 <의암별제>를 지냈는데, 그때 기생들이 검무를 춘 게 <진주 검무>의 효시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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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검무의 공연 모습.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고려 신우왕 11년에 이담이 계림(경주)에서 검무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 세조와 성종 사이에 살았던 김종직의 시문집인 「점필재선생집(佔畢齋先生集)」에도 “경주에서 황창의 검무를 보았으며, 이것이 처용무와 함께 연희되었다.”는 글이 있고,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동학도들이 검가를 부르며 검무를 추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특히 경상도 지방에 오랫동안 검무가 전해져 온 것은 확실한 듯합니다.

“이 춤사위들을 배우는데, 처음에는 멋도 없고 힘들고 어렵기만 해. 그래도 참고 오래오래 배우다보니 점점 맛이 나는데, 오히려 빠르게 움직이는 때보다 느린 장단에 천천히 출 때 더 흥이 나. 속춤을 출 줄 모르면 손이 아파서 잠시도 손들고 못 서 있지. 정중동의 맛을 아는데 한 십 년이 걸렸어요.”

십년이 지나 이수자가 되니 문화원 살림살이를 맡아야할 책임과, 전수자를 교육해야 할 책임과, 일반인에게 보급해야 할 책임이 그녀에게 한꺼번에 지워졌습니다. 그녀는 곰곰 생각한 끝에 장사를 그만 두고 검무와 관련된 일에만 전력투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게다가 때마침 '진주민속예술보존회관 건립'이라는 어려운 숙제마저 떠안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무지막지한 싸움’ 끝에 '진주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이 세워져서 남의 무용학원을 전전하며 초라하게 지내던 신세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진주 검무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던 중, 옛날의 학구열이 되살아난 그녀는 쉰여섯 살의 만학도로 고려대학원 한문교육학과에 입학하여 2년 뒤에 기어코 졸업하고 말았습니다.

또 문헌을 조사하다가 <의암별제>를 지낼 때 제기처럼 술이 달린 공을 문에 던져 집어 넣는 놀이를 춤과 노래를 섞어서 하는 <포구락>이란 놀이가 연희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이윤례 선생의 기억을 되살려서 포구락 춤을 발굴했습니다. 그 춤으로 1984년에 민속경연대회에서 장관상을 타낸 것은 그녀의 끈질긴 학구열과 집념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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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계옥 명인의 학구적이고 단아한 모습.

그런 공로를 인정 받아 '진주민속예술보존회' 회장이 된 그녀는 매일같이 잡무에 시달리고 제자들 뒤치다꺼리하다가 문득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개인의 기능을 열심히 연마해서 명무가 되는 기 낫겠는가, 아니면 진주 검무를 위해 뒷일을 하는 기 낫겠는가 이리저리 따져 보았제.
그란데 이 작은 조직 안에서 시기, 질투, 싸움, 반목이 그칠 새가 없는데 이걸 뜯어고치는 기 내 사명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마 회원들 '종년' 노릇 하자꼬 작정해 버렸제.”

그뒤로 더욱 자신을 돌보지 않고 회관과 회원들의 일에 매달리는 틈틈이 새벽 여섯시에 혼자 회관에 나가 춤을 연습했습니다.

“예능이 뛰어난 사람은 통솔력이 없고, 학벌있고 능력있는 사람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서 화합이 잘 안돼요. 빨리 유능하고 통솔력있고 개인사보다 공적인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나와야 할텐데 걱정이라.”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 검무>의 예능보유자였던 운창 성계옥 명인은 이렇듯 사라져 가는 민족예술의 앞날을 걱정하시다가 2009년 1월에 돌아가셨습니다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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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9-10-24 08:37
 
「동경잡기」에 전하는 '검무(劍舞)'의 유래는 매우 비장하고 전투적입니다.
겨울 19-10-24 08:39
 
성계옥 명인은 이 <진주 검무>의 보유자이자 계승자였고, 후원자이고, 교사였습니다.
겨울 19-10-24 08:42
 
6.25 전쟁이 터지자 지주의 집안이라 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고 부친이 돌아가시는 통에 순식간에 몰락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겨울 19-10-24 08:44
 
진주 기생 논개가 왜군 장수의 몸을 끌어 안고 의암이라는 바위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빠져 죽자 그 순절을 기려
해마다 <의암별제>를 지냈는데, 그때 기생들이 검무를 춘 게 <진주 검무>의 효시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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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문헌을 조사하다가 <의암별제>를 지낼 때 제기처럼 술이 달린 공을 문에 던져 집어 넣는 놀이를 춤과 노래를 섞어서 하는
<포구락>이란 놀이가 연희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이윤례 선생의 기억을 되살려서 포구락 춤을 발굴했습니다.
산백초 19-10-24 17:21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검무는 민속무용의 형태로 남게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진주 검무>는 그 춤가락이나
칼 쓰는 법이 궁중에서 추어지던 검무의 원형을 가장 많이 닮고 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검무로 꼽히고 있습니다.
산백초 19-10-24 17:22
 
19살에 동경 의전을 나온 김상식씨와 결혼한 뒤에도 공부를 계속해서
21살에 준교사 시험에 합격할 만큼 그녀의 향학열은 대단했습니다.
산백초 19-10-24 17:23
 
십년이 지나 이수자가 되니 문화원 살림살이를 맡아야할 책임과,
전수자를 교육해야 할 책임과, 일반인에게 보급해야 할 책임이 그녀에게 한꺼번에 지워졌습니다.
산백초 19-10-24 17:24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 검무>의 예능보유자였던 운창 성계옥 명인은
이렇듯 사라져 가는 민족예술의 앞날을 걱정하시다가 2009년 1월에 돌아가셨습니다
늘배움 19-10-25 09:48
 
신라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의 용모와 닮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그의 춤을 모방하여 추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하는 검무이다.
늘배움 19-10-25 09:49
 
전통예술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가 만연한 땅에서 진주 검무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스승과 동료들과 제자들의
숨은 노력과, 그들을 한 끈으로 묶어 놓을 수 있었던 그녀의 희생과 열정과 통솔력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늘배움 19-10-25 09:50
 
강기례 명인에게 승무와 한량무를 배운 뒤 가야금 산조도 배우면서
차츰 예술의 맛을 알아갈 무렵, 또다시 그녀에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늘배움 19-10-25 09:51
 
최완자라고도 불리는 최순희 명인은 '진주 교방'의 동기였다가 13살 때 중앙의 '장악원'에
뽑혀 예술 교육을 받은 뒤, 궁중에 들어 가 고종 황제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늘배움 19-10-25 09:52
 
공로를 인정 받아 '진주민속예술보존회' 회장이 된 그녀는 매일같이 잡무에 시달리고
제자들 뒤치다꺼리하다가 문득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도한너구리 19-10-26 21:47
 
검무는 ‘전복(戰服)’을 입고, ‘전립(戰笠)’을 쓰고, 가면을 쓰고, 진짜 칼을 들고, 남성적인 활달한 춤을 추는 무사들에 의해 오랫동안 추어져 왔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어느 틈엔지 기생들이 우아하고 아름답게 추는 춤으로 바뀌었는데, 어떤 사연으로 검무가 그렇게 변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도도한너구리 19-10-26 21:48
 
내 평소 성격 상 도저히 허용이 안되는데 우째서 그랬는지 지금도 몰라. 그때 그걸 남편이 본 기라. 싱긋 웃더니 ‘그렇게 추고 싶으모 놀러가지’하는데 우째 부끄럽던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제.”
도도한너구리 19-10-26 21:50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이지만 오적의 두목에게 몸을 팔지 않겠다’고 말해 크게 노한 이시홍이 그녀를 때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걸로 보아 이미 진주에는 기생들에 의해 검무가 추어지고 있었는데, 그 유래를 논개의 죽음에서 찾는 이가 많습니다.
진주 기생 논개가 왜군 장수의 몸을 끌어 안고 의암이라는 바위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빠져 죽자 그 순절을 기려 해마다 <의암별제>를 지냈는데, 그때 기생들이 검무를 춘 게 <진주 검무>의 효시라는 겁니다.
도도한너구리 19-10-26 21:50
 
“이 춤사위들을 배우는데, 처음에는 멋도 없고 힘들고 어렵기만 해. 그래도 참고 오래오래 배우다보니 점점 맛이 나는데, 오히려 빠르게 움직이는 때보다 느린 장단에 천천히 출 때 더 흥이 나. 속춤을 출 줄 모르면 손이 아파서 잠시도 손들고 못 서 있지. 정중동의 맛을 아는데 한 십 년이 걸렸어요.”
도도한너구리 19-10-26 21:52
 
“예능이 뛰어난 사람은 통솔력이 없고, 학벌있고 능력있는 사람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서 화합이 잘 안돼요. 빨리 유능하고 통솔력있고 개인사보다 공적인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나와야 할텐데 걱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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