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 전역사를 정치 난법판으로 몰고간 이상호는 1888년생이고 이정립은 7세 아래이며 막내 동생 이순탁은 11세 아래입니다. 이순탁은 보천교 자금으로 일본에 유학하여(보천교연혁사)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나 은혜는 잊어버리고 신앙을 바꾸어 기독교 골수로 변질되어 돌아옵니다. 연혁사에 나오는 순탁은 해방후에 요즘이면 재정경제부의 최고위 보직까지 역임하여 일세의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상제님이 쓰신 차경석보천교 교주는 기국과 도량이 광대하였으며 부귀영화보다는 보천교 내내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산으로 전국으로 도피생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차경석교주가 태모님을 신도들과 분리시키는 사건도 보천교 초기 이상호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2변의 육이오 동란, 서울 한강다리가 폭파되었을때 마지막으로 한강에서 배를 타고 운산 태사부님이 건너오실 때 동행한 사람이 이정립 그리고 이정립 처남 장상달 그리고 보천교담당형사 였던 근하 이종명이란분 이었다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강을 건너 오산까지 걸어가셧고 그 후에 온양까지는 차를 타고 가셨다 합니다.
오산까지 왔을때 이정립은 어린 처남 장상달을 네 갈길로 가라 며 내 쫓앗다고 합니다. 당시에 하늘에는 폭격기가 날아다니고 위태로운 전쟁난민사이에 사람의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때, 냉정하게 내쫓는 것을 보고 참 비정한 사람이구나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이정립은 태사부님이 도제인 배동찬씨의 연맥으로 장씨부인과 결혼을 맺어준 인연이 있습니다.)
운산 태사부님은 장상달을 데불고 서산까지 가는데, 용돈을 두둑히 주어 고향에 가 있으라고 하였는데 후에 이정립 부인에게 왜 장상달이를 여비도 안주고 내쳤느냐고 크게 원망을 뒤집어 쓰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보천교 연혁사를 쓴 간부들의 눈에 의하면 이상호는 교를 위하는 인물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머리는 좀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찍이 해방전후시기에 상제님 사업을 하려고 마음먹은 운산 종도사님은 주유천하 하실때 전주 금남면 황사고개 인가에 사시는 박공우 성도님의 수제자 인 송종수를 만납니다. 송종수님은 당시에 의통제작을 하고 있으셨다고 합니다. 그해 6월경에는 정읍으로 옮겨다니며 의통제작을 합니다.이때 의통에 대해 자세히 아시게 됩니다. 송종수 씨는 뒤에 대전 대흥동에도 사셧는데 도모님이 돌아가신후 송씨문중에 잠시 가묘하시는데 도움을 줍니다.
정읍도장이 있던 시기리에서 대흥리 까지는 도보로 약 이십여분 걸리는 거리인데 그곳에 이한우 김순탁이라는 분의 집에서 이상호를 처음으로 만납니다. 보천교 신도였던 윤설 이라는 분 함우영 김태성이라는 분도 있었다 합니다. 그 인연으로 이상호 집으로 가게 되는데 이상호 방에 가니 이상호가 박공우 선생의 의통전수해준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때를 모른다 하면서~ 지금처럼 의통을 만들고 있었다 합니다. 이상호는 의통은 육임이 사용하는 것인데 함우영이라는 사람이 의통제작에서 빠져나가면서 한사람이 비니 운산 태사부님에게 자기 연비로 들어오라고 하는 말을 하는데 태사부님은 웃음으로만 대하였다 합니다. 그때 이상호는 거의 실명단계로 시력이 아주 안좋았다 합니다.
2변의 대법사는 전부가 태사부님이 짜신 판입니다. 대법사 이름도 젊은 태사부님이 지으신것이고 이상호와 태사부님은 같은 방주로 초기 조직은 모두 총사수이신 태사부님이 짜십니다. 보천교 초기처럼 수방주 목방주 토방주등, 육이오 전후에 운산 태사부님은 의통제작에 전 재산을 올인하는데 이상호 형제는 의통성금을 유용하는등 용처를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도제들을 상위에 앉게하는등 조직을 전횡하고 젊은 태사부님을 지금으로 치면 왕따를 하여 뒤에 육십년대 초기까지 이상호 형제의 살해 위협속에서 떠돌아 다니게 됩니다. 이정립은 증산교사에서 아주 내용을 비틀어 버립니다. 증산교사는 뒤에 이정립의 아들이 출판사를 하면서 내놓게 되고 저간의 사정을 잘 모르는 홍성렬 씨는 이정립의 왜곡된 소식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홍성열은 그 형이 먼저 신앙을 하였는데 아산방면에 사시던 박제근 이라는 신도가 형제를 보살펴주고 공부도 가르치고 하였다고 합니다. 홍성렬은 아버지가 홍만표라는 분으로 상제님을 극렬 비방하는 분이었으며 홍성열 어머니는 강물에 빠져 돌아가시는 비운을 맞았고 그 충격인지 홍성열은 젊은 초기에는 카톨릭인가를 신앙하다가 다시 증산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홍성열은 태모님을 인정하지 않는지, 대법사에 모셔져 있는 태모님 진영을 떼어 발로 밟는 난폭한 행동을 하여 그것을 지켜본 오성산 신도들은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오성산신도에게 최근 들음)
이상~ 삼변 초기 약 삽십수년전에 보문산 대사동에서 태사부님에게 이변에서 삼변 바뀌는 말씀을 듣고 요약해 놓았던 것을 찾아 간단히 올립니다.
더 많은 운산 종도사님 강의록을 알고 계시는 분은 좋은 자료를 올려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